홈 > 성지소개 >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 아씨시

 

   
 

 

 

 

 

 

 

이탈리아 중부의 움부리아주라는 작은산이 많이 있는 지방에 있는 마을로써 스바지오산의 경사면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작은 마을이다.

 아씨시는 12세기에 성 프란치스가 태어난 마을로 더욱 유명하며, 산 프랑체스코성당을 시작으로 프란체스코계열의 교회가 있다. 교회의 건축과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벽화나 묘지등 아름다운 미술품을 보면서 성 프란치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아씨시 마을을 걸어가면 종교와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성의 요새로써의 도시구조를 가지고 있다. 뒷쪽 산의 경사에 마을이 위치하고 산의 정상에는 성이 세워져있다. 마을의 주변에는 성벽이 둘러써있다. 산정의 성은 로마제국시대의 황제의 대리가 마을을 감독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자치도시로써 다시 독립했을 시에는 이 성을 파괴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성은 14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1228년 7월 17일 프란치스코의 시성식이 지난 며칠 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현재의 대성당 (바실리카)의 초석을 놓았다. 프란치스코의 유해 이전은 1230년 5월 25일에 있었다. 바실리카 외부는 건축된 이래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성당은 건축가 마에스뜨로 야고보 떼데스코가 설계 건축을 맡았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아씨시에서 주요 성지로 일컬어질 만큼 웅장하다. 1층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2층은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228년 그레고리오 9세가 성당 건축을 위한 헌금모금을 인준하는 칙서를 공포해서 그해 성전 건축의 초석을 마련했다. 공사 시작 22개월 만인 1230년에 1층 성당은 중앙통로만 있고, 제단 3m 아래에 성인의 유해를 안치했다. 1236년에 위층 성당의 지붕이 덮여졌고, 1239년에 종각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성인의 무덤과 예술가들의 조각과 그림으로 꽉 차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오른쪽에는 성서적인 영감을 받은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옷을 벗기우신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내리우시고 묻히신 모습, 엠마오로 가는 길 등.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장면들이었고, 왼쪽의 그림들은 재물 포기, 인노첸시오 3세의 꿈, 새들에게 설교, 오상, 장례식 등 주로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생애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1250-1650년까지 4세기에 걸쳐 이태리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렸다고 한다.

♠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수차에 걸친 발굴 작업 끝에 드디어 1818년 1월에 성공했다. 시신은 600년 전 엘리아 형제가 감춘 세 개의 무거운 석회암 밑에 안장되어 있었다. 1230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시신의 이장과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벽 속에 준비한 묘에 통하는 비밀 통로를 만들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무덤 주위에는 안젤로, 맛세오, 레오, 루피노 등 초기의 네 동료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성인의 무덤 맞은편에는 야고바 부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엄숙하면서도 기도하고 명상할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대성당 아래층에는 무덤과 경당으로 되어 있는데, 성 안토니오 경당, 성 스테파노 경당, 성 안토니오 경당, 막달레나 경당 등이 있다.

♠ 아랫쪽 성당: 지오또(Giotto) 화풍의 어느 작가가 성당 내부의 그림을 그렸 다. 제대 윗쪽은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정결, 순종, 그리고 승리를 본뜬 같 은 계열의 작품이 있다. 성인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치마부에 (Cimabue)의 성 프란치스코 성화도 있다. 로렌제띠(Lorenzetti)의 마돈나 델 디또(Madonna dal dito)와 십자가형(Crocefissione)등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 윗쪽 성당: 안 중앙부에는 지오또와 그의 문하생들이 그린 프란치스코의 생애 와 기적들을 프레스코 화풍으로 그린(1290-1295) 유명한 28개의 작품이 있다.

♠ 유물 보관소: 희귀한 유물들이 있다. 호노리오 3세로부터 승인을 받은 회 칙, 프란치스코를 위하여 글라라가 만든 털신발, 마지막 병 중에 사용하신 종 이, 임종시의 의복, 야꼬바 부인이 만든 자수, 레오 형제에게 주신 프란치스 꼬의 친필 강복, 에집트의 술탄으로부터 받은 상아뿔, 성 안또니오의 팔 등.

♠ 유대성당 아래층의 주 제대 : 위쪽에는 돛 모양의 천장화가 있는데, 지오토 제자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셋은 가난, 정결, 순명을 표현한 그림인데, 청빈은 프란치스코가 가난 부인과 약혼한 그림이고, 순명을 표현한 그림에는 프란치스코의 목에 멍에가 매어져 있다. 이는 구속된 의미이며 구속되었을 때 자유로움은 느낀다는 내용이다. 정결을 나타내는 그림은 부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장면인데, 이는 깨끗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 ‘황혼의 성모’ : 이 그림은 성 요한과 성 프란치스코 사이에 아기 예수와 성모가 있다. 혹자는 이 그림 속에 담긴 신비스런 대화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고 한다. 즉 아기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요한과 프란치스코 중에 누가 더 어머니를 사랑합니까?’하고 질문했는데, 성모님이 살그머니 프란치스코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애정과 공경의 작은 표시일 것이다.

 

 

 

 

 

 

성녀 글라라 대성당은 네 가지 이유로 성 프란치스코와 밀접한 곳이다. 1190년경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라틴어를 배웠고, 프란치스코가 설교한 장소이며, 성인의 유해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옮겨지기 전인 1226년부터 1230년까지 안치되어 있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1228년에 그레고리오 9세가 프란치스코의 시성을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

성녀 글라라 대성당은 로마양식과 고딕양식이 섞여 있고, 성당 왼쪽의 둥근 아치 형태의 버팀 벽들은 편안한 느낌을 준다. 종탑은 아씨시에서 가장 높은 것이라고 한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 보면 제대 위의 천장에는 성녀 아녜스, 성녀 가타리나와 다른 성녀들, 성녀 글라라 등의 그림이 있고, 후면에는 동정 마리아, 성 요한, 성녀 글라라, 성 프란치스코 등의 그림들이, 왼쪽에 위치해 있는 성녀 아녜스 경당에는 성녀 아녜스와 베아트리체, 어머니 오르톨라나의 유해가 묻혀 있다.

♠ 성 다미아노 십자가 : 프란치스코가 기도했던 성 다미아노 십자가는 안전을 위해 이곳에 옮겨져 소장되어 있다.

♠ 성녀 글라라의 무덤 : 지하에 자리한 성녀 글라라 무덤에는 성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1850년 성녀 글라라의 시신이 상하지 않은 채 발굴되었고, 1872년에는 성녀의 상하지 않은 시신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1893년에는 성녀의 옷들과 함께 글라라 회칙의 원본을 찾아내었고, 1988년 성녀의 얼굴과 손이 밀랍으로 봉해진 뒤 좀 더 소박하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유물보관소에서는 성녀의 금발의 머리카락, 레오 형제의 주석이 쓰인 사부님의 성무일도, 투니카, 성녀가 만든 긴 옷 등을 볼 수가 있다.

 

 

 

 

 

 

 

 

 

 

 

굽비오의 요한(Giovanni da Gubbio)이 1134년에 현재의 성당 건물을 시작하였다. 종탑은 2000년 이상된 시의 원시 대리석 물탱크 위에 세워졌다. 16세기 말경에 대성당 내부가 완전히 도리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아치는 원래의 지붕보다 훨씬 아래쪽에 재건축되었다. 장미 창문은 1140년에 만들어졌으며, 제대는 1228년에 축성되었다. 통고의 마돈나는 1494년 존속살해단 사건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210년에 미노레스(Minores)와 마요레스(Maiores)간의 평화조약이 여기에서 체결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곳에서 세례를 받았고 나중에 산 루피노에서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였다(대전기 4,4). 그는 토요일에 와서 기도하곤 했던 제의실 옆 작은 방에 머물면서 주일 전례를 준비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공적으로 죄를 고백하기도 하였다(대전기 6,2).

 

 

 

 

 

 

 

 

 

 

 

현재의 키에사 누오바(새 성당)는 1619년에 스페인의 필립 3세에 의해 프란치스코가 유년기를 보낸 삐에뜨로 베르나르도네의 집터라 여겨진 곳에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이 아닐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성당에는 성인의 유물 몇가지가 남아 있으며 “회개한 프란치스코”에게 봉헌되었다. 입구 바로 왼편에 중앙 도움부분을 받치고 있는 벽기둥 안에 작은 출구가 있다. 이곳은 아마도 프란치스코가 산 다미아노 성당의 보수를 위해 옷감들을 내다 판 후에 아버지로부터 감금되었던 어두운 방이었을 것이다. 오른 편에는 창살이 설치된 베르나르도네 집의 원래의 대문이 있다.

 

 

 

 

 

 

 

 

 

 

 

 

 

 

 

Rocca Maggiore는 아씨시 읍을 내려다보고 있다. 왼쪽으로 수바시오 산이 있고 수바시오 산골짜기에 카르첼리 은둔소가 있고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 오른 쪽 가까이에는 포르치운쿨라가 있고, 리보토르토의 탑이 솟아 있다. 계속 오른 쪽으로 보면 프란치스코가 처음 글라라를 데려갔던 바스티아가 보이고, 이어 프란치스코가 전쟁포로가 되었던 성 요한 다리가 나오고, 더 멀리 페루지아가 불빛 사이로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로카 마죠레에서 서쪽으로는 아미아타, 북쪽으로는 카센티노까지 이르는 움브리아 평원을 내려다 볼 수 있고, 로카 아래쪽 계곡에는 테쇼 강이 흐른다.

로카 마죠레는 긴 세월 동안에 걸친 수난으로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르네상스 군사 건축의 한 좋은 예를 보존하고 있다. 이 건물은 커다란 직사각형으로 축조된 것으로써 모퉁이들에는 네 개의 망루가 서 있다. 중앙에는 아씨시 주변의 전망을 볼 수 있는 큰 망루가 솟아 있다. 동쪽에는 로카 미노레가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시의 성벽이 있는 12각형의 망루에까지 이르는 지름길이 있다. 

현재의 성은 14세기의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이 자리는 원래 이교도들의 사원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여기서 서쪽으로는 아미아따 산, 남쪽으로는 시벨리네와 아브루찌 산들, 북으로는 까센띠노까지에 이르는 움브리아 평원을 내려다 볼 수 있다. 1198년 프란치스코가 18세일 때 아씨시 시민들은 스뽈레또 공작령에 속해 있던 성을 빼았았다.

성은 교황권과 황제권, 아씨시와 뻬루지아, 마요레스와 미노레스간의 알력을 상징한다. 이 장소의 방문은 우리에게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상기시켜 주며 우리의 평화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생각케 해준다.